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미숙함과 익숙해지기

 학교에서 글쓰기 수업을 듣고 있다. 글을 쓰려고 들은 건 아니고 졸업하려면 들어야 했다. 전체적으론 듣길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귀찮다. 교양 주제에 과제가 많아 종종 잘못 골랐다는 생각을 한다. 매주 글 한편씩 써내라고 한다. 부족한 글솜씨 덕에 매 주말마다 겨우 적어낸다. 이제 글 쓰는 과제는 대충 마무리지만 평가 과제가 남았다. 오늘도 남의 글을 읽고 평가하다가 글을 쓴다. A4 한 페이지 정도 글 여덟 개를 읽어야 한다. 잘 쓴 글도 있고 못 쓴 글도 있다. 잘 쓴 글은 평가하기 힘들다. 과제 내용이 개선점을 찾아 피드백을 주는 것인데 별것 아닌 걸로 트집 잡기 밖에 할 게 없기 때문이다. 나랑 비교돼서 자존심 상하기도 한다. 반면 못 쓴 글은 읽기 힘들다. 나도 같이 부끄러워지기 때문이다. 그리고 내 글을 읽을 사람들을 생각하면... 오싹하다. 그런 글을 보냈다니. 그때는 바빴다.

 이제 글쓰기 수업을 듣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점을 말하고 싶다. 미숙함에 대한 이야기다. 사실 블로그를 시작하려고 마음먹은 적이 여러 번 있다. 그때마다 실패한 이유는 미숙함이 두려워서였다. 나는 못하는 게 싫다. 아니 못하는 건 참을 수 있다. 못하는 걸 보여주는 것은 정말 참을 수 없다. 그때도 그랬다. 블로그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개발자로 취업하기 위한 포트폴리오를 쌓기 위해서였다. 티스토리를 골랐다. 간단하게 시작할 수 있고 당시 내가 찾던 많은 블로그가 티스토리로 돼있어 골랐다. 개발을 공부하며 부딪힌 오류나 읽은 책 따위를 올렸다. 게을렀지만 꽤 의미 있는 활동이었다. 한 포스트는 꽤 많은 조회 수가 찍혔다. 댓글로 감사하다는 말도 들었다. 기분 좋았다.

 

 일이 잘못된 것은 내 눈이 높아지면서다. 세상에는 개발을 잘하는 사람도 글을 잘 쓰는 사람도 정말 많았다. 네이버나 카카오의 기술 블로그는 물론이고 학부과정 중 러스트로 swc를 만든 kdy1님, 네카라쿠배 중 '배' 우아한 형제들을 퇴사해 컬리에서 일하는 기계인간님 등 날고 기는 사람들이 많았다. 큰 회사는 제외하고 그 사람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정적 페이지 생성기를 써서 블로그를 한다는 것이다. 나도 GitHub Page로 이주를 시작했다. 물론 다른 중요한 공통점이야 차고 넘쳤다. 개발을 잘한다. 새로운 걸 빠르게 배우고 써먹어 보았다. 꾸준하게 블로그를 운영했다. 기초이론부터 유행하는 언어나 패러다임까지 그냥 개발과 공부를 좋아했다. 그런 걸 다 재끼고 정적 페이지 생성기가 눈에 띄었던 것은 단순한 허영이었다. 그것만 하면 나도 그들에게 한 발자국 가까워질 것이란 도독 놈의 심보가 있었다. 그래도 그 덕에 정적 페이지 생성기와 GitHub Page에 익숙해지긴 했다. 그런데 왜 다시 티스토리에 글을 쓰고 있냐고? 마크다운으로 글을 써 놓고 배포를 안 했다. 써 놓은 글이 눈에 차지 않았다. 배포 한번 안 하고 레포를 지웠다. 남들 앞에서 미숙함을 보일 바에 시작하지도 않은 척하는 것이다.

 

 그리고 한참 후 글쓰기 수업에 남들이 쓴 글을 읽으며 대신 부끄러워하고 있다. 이 수업의 좋은 점은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. 우리 학교는 드롭이 안되니 휴학 아니면 F 다. 이런 과목인 줄 알았으면 애초에 안 들었을 텐데 정정기간이 끝난 지 한참이다. 그래서 매주 글을 써내면 교수님이 친히 평가해 주신다. 이 내용은 필요가 없고 띄어쓰기를 잘못했고 문단을 끊어서 써라, 결론만 따로 논다. 내가 알고 있던 부분도, 모르고 있던 부분도 보게 된다. 난 글을 존나 못 쓴다.

 

 다행인 점은 내가 못하는 데 익숙해졌다는 점이다. 처음 글을 써 낼 때는 마감 직전까지 고치고 또 고쳤다. 내가 쓰기 까다로워하는 주제라서 어려웠던 점도 있지만 글이 나아진 점도 없는데 애를 먹으며 고치고 있었다. 고치는 게 나쁜 건 아니다. 나쁜 건 나아진 점이 없는 것이다. 밑 빠진 독에 물 붙기다. 이제는 적당히 하고 낸다.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는 걸 안다. 혼자 해낸다면 좋겠지만 더 쉬운 방법이 있다. 피드백을 받는 것이다. 그냥 낸다. 블로그도 그렇게 했으면 좋을 텐데 말이다. 이젠 못하는 데 익숙해졌다. 블로그를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. 글 실력이 는 건 덤이다.

 과제를 하다가 글을 쓴다. 남들이 쓴 글을 평가하는 과제인데 다양한 글이 있었다. 글이 깔끔하고 분명해서 좋다는 평 밖에 못 쓴 글도 있고 대충 쓴 것 같은 글, 허영에 찌든 글도 있었다. 글을 쓰다가 생각난 건데 지금 이런 글을 쓰는 이유를 알 것 같다. 남의 글을 읽다가 부끄러웠던 것은 내 글의 부족한 부분이 생각난 영향도 있을 것이다. 이렇게 할 걸 그렇게 하면 안 됐는데 하는 생각이 자꾸 스쳐갔다. 특히 허세는 쓰리다. 이 글은 내 글의 미숙함에 대한 혼자만의 변론 일지 모르겠다. 하지만 미숙함에 익숙하길 바라는 마음은 진심이다. 자신의 못난 부분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. 반면 거기에 무뎌져서는 안 된다. 잘하고 싶어 못하는 부분을 바로 보는 것이지 자신을 미숙한 사람으로 여기려는 것이 아니다.

이제 과제를 마저 해야겠다.